몇 년 전 일이다. 지인 A가 상속을 받아 5억 원 넘는 현금을 갖게 됐다. 그러자 A의 친척 B가 A에게 찾아와 투자를 권했다. 자신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투자하면 충분한 이익을 주겠다는 권유였다. A는 B의 사업 아이템이 괜찮다고 생각했고, 갖고 있는 현금 대부분을 투자했다. A의 아내는 이 투자에 대해 불안해했다. B가 나중에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A는 이 한마디로 아내의 의심을 막았다.
“그럴 애 아니야.”
A는 친척 B를 어려서부터 겪어왔다. B가 착한 사람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B가 다른 사람 돈을 빼돌리거나 사기를 칠 일은 없다고 봤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걱정이 됐다. 내 마음에 걸렸던 건 A가 B에게 돈을 투자해도 된다는 근거였다. B는 착한 사람이고, 사기 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B를 알지 못하지만 A는 어려서부터 B를 봐왔다고 하니 A의 판단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이 괜찮은 것과 사업을 성공시켜 투자 원금 및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얘기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돈이 없으면 돌려줄 수 없다. 착한 사람은 돈이 있으면 돌려줄 것이고, 나쁜 사람은 돈이 있어도 안 돌려줄 것이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일단 그에게 돈이 있어야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착하냐 아니냐보다 일단 망하지 않고 돈을 불릴 수 있느냐가 먼저다. 그런데 A가 B에 대해 한 말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며, 사기를 칠 리 없다는 내용뿐이었다. 좀 불안했다. “A의 돈이 과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사실 A의 결정은 나무랄 부분이 없다. 사람은 타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때 그에게 돈과 자산이 얼마나 있는지를 기본으로 생각한다. 돈을 갚을 수 있는 기본 경제력이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다. 하지만 A는 B의 경제력은 생각지 않고 B의 인격만을 기준으로 투자를 결정했다. 돈보다 인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J.P. 모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경제를 주무른 거대 금융 자본가다. 은행업을 기반으로 당대 최고 산업 분야이던 철강, 전기·전자, 정유 등을 지배했다. 1912년 모건은 금융 비리를 조사하는 국회청문회에 서게 됐다. 국회 소위원회인 푸조위원회가 금융 비리를 조사하기로 했고, 금융산업 대표자인 모건을 청문회에 불러 심문한 것이다. 이때 조사관 새뮤얼 운터마이어는 모건에게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며 추궁했다.
운터마이어는 모건이 인맥 또는 그 사람의 자산 수준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고 봤다. 은행이 자신과 친한 사람, 아니면 돈이 충분한 사람에게만 대출을 해주는 건 잘못된 게 아니냐고 꼬집으려던 것이다. 하지만 모건은 돈을 빌려주는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인격이다. 인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된다.”
운터마이어는 재차 “중요한 건 재력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모건은 단호했다. “돈보다 인격이 먼저다. 돈으로는 인격을 살 수 없다.” “내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산 증서를 가져와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J. P. 모건(왼쪽)과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때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인격’이다. [위키피디아, 뉴스1]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여기저기 다니며 한양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변 씨가 가장 부자라는 말을 듣자, 그는 곧바로 변 씨를 찾아가 이렇게 부탁한다.
“집이 가난해서 장사 밑천이 없다. 무엇을 좀 해보려 하니 1만 냥을 빌려달라.”
변 씨는 허생의 이름도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1만 냥을 빌려준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1만 냥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변 씨는 이렇게 답한다.
“돈을 빌리려고 오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길게 늘어놓는다. ‘약속을 꼭 지키겠다’ ‘걱정하지 마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얼굴빛은 뭔가 비굴하다. 하지만 저 사람은 겉모습은 가난해도 말이 간단하고, 눈이 비굴하지 않으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보겠다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
변 씨는 허생과 친분이 있어서 돈을 빌려준 게 아니고, 허생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해서 돈을 빌려준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허생이라는 인간을 믿고 1만 냥을 빌려준 것이다.
현대에서 이런 식으로 돈을 건넨 가장 유명한 사례는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에게 투자한 일이다. 2000년 마윈은 투자금을 유치하려고 손정의를 만났다. 이때 손정의는 마윈을 만난 지 5분 만에 2000만 달러(약 290억 원) 투자를 결정했다. 설립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기업에 이 정도 대규모 금액을 투자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이다. 그런데 손정의와 마윈은 당시 돈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령 돈이나 사업 얘기를 했다고 해도 5분 동안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겠나. 변 씨가 허생을 만나 몇 마디 나눈 뒤 바로 1만 냥을 빌려준 것처럼, 손정의는 마윈을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누고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다. 이들 사례에 비춰보면 돈이 얼마나 있느냐,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부차적 문제다.
나도 모건, 변 씨, 손정의의 의견에 찬성한다. 돈보다 인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사업 아이템이 무엇인지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은행은 대출해줄 때 인격을 고려하지 않는다. 금융기관이 돈을 빌려줄 때는 그 사람의 소득과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가 최우선이고 거의 유일한 기준이다. 소득과 재산 없이 신용만으로 돈을 빌리려 한다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몇천만 원조차 힘들다. 반대로 10억 부동산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쉽게 몇억 원을 빌릴 수 있다. 운터마이어가 청문회에 참석한 모건에게 대출해주는 기준이 재력이냐고 물은 건 충분히 근거 있는 의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고, 인격이 더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게 모건, 변 씨, 손정의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A가 B에게 투자하기로 한 건 찬성하기 어렵다. 자산 수준, 사업 아이템보다 인격이 더 중요한 건 맞지만, 여기서 인격은 ‘착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기 치지 않는다’와는 조금 다르다. 이때의 인격은 투자금을 날리지 않고 수익을 낼 수 있는 능력, 자기가 목표로 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사실 착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보다 이런 성취 능력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착해도 돈이 없으면 돌려줄 수 없다. 일단 뭔가를 이뤄내야 돈을 갚을 수 있다. 따라서 돈을 투자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이 돈으로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느냐다.
사회 통념상으로는 착한 사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투자 세계에서는 성취 능력을 지닌 사람이 더 뛰어난 인격을 가진 것이다. 착하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모건은 인격이 좋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고 했는데, 여기서 인격이 좋은 사람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이지 착한 사람이 아니다. 허생전의 변 씨가 허생에게 돈을 빌려준 건 허생이 착해 보여서가 아니며, 손정의가 마윈에게 반한 것도 마윈이 착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인격은 착한 것과 관계가 없다.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인격이 좋다는 것과 투자·돈의 세계에서 인격이 좋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A가 B에게 돈을 투자한 지 몇 년이 됐다. B는 사업을 접었고, A는 모든 돈을 잃었다. B가 사기를 쳤다거나, 돈을 안 갚겠다고 버틴 건 아니다. B는 여전히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B는 돈이 없고, 그러니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돈을 돌려줄 수 없을 뿐이다. 인격은 중요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격과 투자 세계에서 말하는 인격은 좀 다르다. 일반적 인격 개념으로 투자를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이것이 A의 투자가 실패한 근본적 원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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